김천시립박물관 관람 김천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김천 직지사 사명대사 공원 내에 있는 김천시립박물관 관람하여 김천 문화의 뿌리 찾기

 

꾸뻑!! 안녕하세요? Let's go! Happy together!! 정거장은 있어도 종착역은 없다 [산비탈 사는 이야기] 산비탈 인사드립니다.

 

산비탈이 김천 여행 직지문화권 둘러보기 투어 중에 직지문화공원에서 공원의 진수와 문학 소년의 추억에 젖어보고 , 세계 도자기 박물관에서 장인정신과 조상의 얼을, 사명대사 공원에서 유정 사명대사의 호국정신과 탑의 건축의 미를 감상하고 오늘은 김천 시립박물관에서 김천문화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천시립박물관

직지사 앞쪽 무궁화공원 앞에서 담아본 김천시립박물관 전경입니다. 무언가 평화스럽게 보이는 하늘 모습과 소나무들의 조화 속에 자리 잡은 현대적 건물 모습이 문화를 품게 합니다.

 

사진 왼쪽에 주차된 차량이 그림을 반감시키는 게 옥에 티랄까..ㅋㅋ 만족하는 그림은 없겠지요?

 

사명대사공원에서 바라보는 김천시립박물관 - 여름촬영

김천시립박물관은 사명대사 공원 끝자락에 자리 잡은 김천문화의 뿌리를 공부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은 곳입니다. 주말이나 쉬는 날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이 근처의 공원과 문화공간 그리고 사명대사 공원에서 공원의 진수를 느끼고 이곳에서 김천의 문화를 공부해 보시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김천시립 박물관 - 여름촬영

■ 김천시립박물관 관람안내

  • 관람시간 - 09:00~18: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 관람료 - 일반 개인 1,000원, 단체 700원, 청소년 및 군인 500원, 단체 300원
  • 김천시민 - 일반 500원, 청소년 및 군인 300원
  • 무료 - 65세 이상 노인, 6세 이하 어린이, 장애인

유모차, 휠체어 무료로 대여하고 상설전시장 정기해설은 1일 6회 실시하고 성인, 청소년, 가족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1전시실 - 2F

김천시립박물관 2층에 있는 제1전시실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김천의 역사를 전시한 곳입니다. 선사시대는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바로 전까지로 김천의 선사시대 중 가장 이른 시기는 신석기시대입니다.

 

이후 새로운 금속인 청동의 등장과 이보다 강력한 철이 보급되면서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구성명 송죽리의 바리(신석기시대), 부항면 지좌리 반달 모양 칼(청동기시대), 문당동 검은간토기(철기시대)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 김천의 문화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에서 김천지역이 갖고 있던 위상과 당시 사람들의 풍속 및 생활상 등을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김천의 생활문화는 생활유적이나 무덤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고 김천 덕천리, 모암동, 문무리, 용전리, 성내동 등의 무덤 유적에서 나온 각종 토기를 비롯하여 청자, 청동, 그릇과 수저 동전 등 당시 생호라상과 더불어 매장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특히 청동 숟가락 자루의 옆모양이 S자형으로 크게 휘어지고 중기로 가면서 자루의 끝이 제비꼬리처럼 두 갈래로 갈라지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무덤의 제작연대를 알려주는 기준점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김천 월곡리 무덤에서 출토된 희녕원보와 대정 통보는 각각 중국 송나라와 금나라에서 사용되던 동전으로 당시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분청사기와 백자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고인돌
김천의 토기

김천의 토기, 삼국시대의 토기는 형태에 따라 신라 양식과 가야 양식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낙동강을 경계로 구분되기도 합니다.김천은 지리적으로 낙동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가야양식에 속하지만 4~5세기경 출토되는 토기의 양상을 보면 신라양식과 가야양식 혹은 가야 양식의 영향을 받은 재지 양식 등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김천지역에 존재하던 당시 정치 집단의 문화적 정치적 면모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감문국 감문의 지배자

김천은 내륙교통의 요지이자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주요 거점지역으로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으로 신라는 231년 이찬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한 군대를 감문국에 보내어 신라의 군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군사적 목적과 함께 서해를 통한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유입할 문화적 창구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후 신라는 557년 진흥왕 18년 지방행정 및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던 사벌주(상주)를 폐지하고 감문국의 고도인 개령에 감문주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처럼 신라의 지방행정 및 군사적 중심지가 이동된 것은 그들의 영향력을 남쪽으로 확대하여 가야 세력을 공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영남지방을 통일한 신라는 김천지역을 661년에 감문국으로 개편하였고 757년 경덕왕 16년 전국 지명 개정에 따라 개령군으로 편제하였습니다.

 

김천시립박물관 3F 제2전시실

김천시립박물관 3F에 자리한 제2전시실은 김천의 근. 현대 역사 및 문화관광자원 등을 전시한 곳으로 김천의 종교문화, 김천문화의 뿌리, 근. 현대의 김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입니다.

 

김천의 종교문화는 김천이 지리적 이점으로 문화가 흘러가는 길목에 있어 고대부터 선진문화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고 삼국시대 불교를 시작으로 조선시대 유교, 근. 현대사로 오면서 천주교와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종교문화가 자리 잡게 됩니다.

 

김천 문화의 뿌리는 추풍령을 근간으로 하는 영남 내륙 교통의 요지로써 김천은 영남 제1관문이라는 역사적, 지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김천 지역에는 전국 5대장에 속하는 큰 시장이 형성되었고 지역의 문화적 우수성을 바탕으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김천의 유교문화

■ 김천의 유교문화

 

김천 지역의 유교는 이념적으로 충의와 절개를 지닌 조선 초기 사림의 특색을 지니면서 중, 후기에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파에 따른 이론적 논쟁은 크지 않았는데 이는 유교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폭이 넓었음을 의미합니다.

 

김천의 유교에서 김산 문향을 빼놓을 수 없고 이는 김종직이 경렴당을 세우고 김천에 머물자 지역의 유림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생겨난 용어로 조위, 이약동, 최선문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촉발된 무오사화로 인해 영남 사림들이 큰 피해를 당하게 되었으며 경렴당이 있던 기천 지역은 그 피해가 더욱 심각하여 이후 점차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김천의 유교문화,서원,서당

■ 김천의 유교문화, 서원, 서당

김천의 서원은 선현의 제사와 유생의 교육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 사설 교육 기고 나이로서 조선시대 중엽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천 지역에는 고려말-조선초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둔과 낙향을 택한 절의 지사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신념으로 서당을 개설하고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고 대표적으로 최선문, 이약동, 이승원, 조위 등 당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여 이 고장을 영남 제일 문향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김천의 서당은 향촌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조선 후기 향촌사회에서 농민을 지배하던 계층인 사족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마을을 기본단위로 설립된 초등단 게의 사설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서당은 처음 서원에 부속된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나타나는 신분 체계의 변화와 평민층의 경제적 성장에 따른 교육 요구 상승 등으로 17세기경부터 독립된 교육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고 김천지역에 위치한 서당의 수는 서당 개설이 허가제로 바뀌던 1930년 당시 47개였습니다.

 

김천의 전통사찰

■ 김천의 전통사찰

직지사 - 418년(눌지 와 2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645년(선덕여왕 14) 자장율사, 930년(경순왕 4) 천묵,936년(고려 태조 19) 증여 등이 중건하였습니다. 조선시대 1399년 정종의 어태가 안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대부분의 건물이 전소되는 참화를 겪고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친 중건으로 오늘이 이르고 있습니다.

 

청암사 - 859년(헌 안 왕 3)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초기 쌍계사 소속 암자였으며 조선 중기 의룡 율사가 중창한 이후 1647년(인조 25) 허정 대사, 1782년(정조 6) 환우 대사, 1905년 용 각화상 ,1912년 대운 대사에 의해 중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관련되는 사찰이기도 합니다.

 

김천의 문화재 자료
김천과하주,김천징장,김천금릉빗내농악

■ 김천의 문화재

김천 과하주 -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 과하주(過夏酒)는 이름 그대로 여름에 빚어 마시는 술 또는 여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 술, 봄에 빚어 여름에 마시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술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김천에는 예로부터 유명한 샘이 있었는데 이 샘에서는 금(金)이 난다고 하고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좋고 향기가 높아 주천(酒泉)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의 장수인 이여송이 왜병을 추격하던 중 이곳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명나라의 과하천과 물맛이 똑같다 고 하여 과하천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샘물로 빚은 술을 과하주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천의 과하주는 익산의 여산 주, 문경의 호산춘과 더불어 전국에서 이름난 술로 유명하고 그 맛이 감칠맛 나고 청량감이 강하여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공물로 진상되는 상품 주로 손꼽혔으며 상류층에서 귀빈 접대용으로 내놓는 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천징장 -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김천은 경기도 안성과 함께 유기로 잘 알려진 지역으로 특히 징과 꽹과리 제작이 유명하고 징은 바디기, 뉘 찜질, 이가리, 싸개질, 담금질, 울음 잡이, 재울 음 등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징 소리는 지방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김천의 징소리는 황소울음과 같이 구성지고 소리의 끝을 길게 끌어 위로 올라가는 것이 특징으로 깊고 긴 여운과 가슴 깊이 파고드는 울림으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김천 금릉빗내농악 -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금릉 빗내농악은 빗내마을에서 전승되어 오는 농악으로 옛 감문국의 나랏제사와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된 동제의 형태로 전승 되었고 금릉은 옛 김천지역의 지명인 김산의 별칭이며 빗내는 광천동의 자연부락 명칭입니다.

 

금릉빗내농악은 비신과 진국이 복합된 굿의 형태를 이루고 있고 양손으로 치는 대북 놀음이 웅장하고 영풍 굿, 양성 다드래기 등 판굿에서 농악대가 여러 가지 진을 짜며 노는 진풀이인 군사진 굿이 두드러지는 점이 다른 농악놀이와 차이를 보입니다.

 

금릉빗내농악의 판굿은 문굿, 질굿, 마당굿, 영풍 굿, 판 안 다드래기, 기러기 굿, 허허 굿, 쌍둥이 굿, 판굿, 영산다드래기, 진굿, 상사 굿의 12마당으로 구성되고 다시 길고 짧은 것으로 119마디로 세분됩니다.

 

김천시 친절,질서,청결운동

산비탈이 이상으로 심플하게 김천시립박물관 관람 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한 고장의 긴 역사를 어떻게 글 몇 자로 다 옮길 수가 없듯이 저 역시 수박 겉핡기식으로 몇 가지만 적어 보았으니 꼭 한 번이라도 직접 방문하시어 김천을 빛내고 오늘에 계승시킨 선조들의 삶과 애환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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